해외여행/독일 베를린

청색타일이 유난히 눈에띄는 성경의 바빌론의 실제가 입증된 유물 바빌로니아 이시타르 성문과 조각들

나그네수복 2012. 7. 26. 14:18

당시 아시아, 아프리카, 태평양 등지에서 더 많은 땅을 차지하려고 각축전을 벌이던 영국과 프랑스는 유물 발굴에서도 접전을 벌였는데, 그것은 땅을 더 갖는 것보다 더 큰 자긍심을 자기네 국민들에게 안겨줄 수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이런 문화제국주의 대열에 뒤늦게 통일을 이룬 독일(당시 이름은 프러시아)까지 끼여들었다. 삼파전이 된 것이다. 독일은 영국의 3C(Cairo, Capetown, Calcutta)정책에 3B(Berlin, Byzantium, Baghdad)정책으로 대응하는 등 적극적인 해외진출을 꾀했으며, 오리엔트학회를 통해 오리엔트지역에서의 발굴작업도 병행 추진했다. 그리하여 로베르트 콜데바이는 그때까지 성서와 헤로도투스의 ‘역사’ 속에서만 살아 있던 바벨탑의 도시 바빌론에서 성스러운 동물 조각들이 박혀 있는 거대하고도 화려한 이시타르 성문을 발굴하여 바빌론의 실재를 증명했을 뿐 아니라 독일의 문화적 자존심도 한껏 높였다. 그는 그걸 해체하여 베를린의 페르가몬박물관으로 옮겼다.

이 박물관은 에게 바다와 가까운 소아시아의 고도 페르가몬에 있던 거대한 신전의 제단을 몽땅 옮겨온 독일이 그걸 전시하기 위해 특별히 세운 박물관이다. 1871년 독일 통일 후 새로운 수도가 된 베를린을 파리나 런던, 로마와 어깨를 겨룰 수 있는 문화도시로 만들고, 신생 후발국가 독일이 유럽에서 행세깨나 하려면 그럴 듯한 그리스 조각 작품 몇 점쯤은 갖고 있어야 한다는 생각에 그렇게 한 것이었다.

-신동아 2000년 12월호 문화비평가 권삼윤의 "세계박물관기행편중 일부분-

 

 

 

 

 

 

 

 

 

 

 

 

 

 

 

 

성서와 헤로도투스의 ‘역사’ 속에서만 살아 있던 바벨탑의 도시 바빌론에서 발굴한 이시타르성문(Ishitar-Tor)

 

 

 

 

 

 

 

 

 

 

 

 

관람객들이 이시타르 성문모형을 들여다보고 있다. 실제로 모형과 똑같이 전시되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