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령 일백사십년이 되었다는 향나무. 융건능 공원의 입구에 서있는 처연한 모습이 사도세자와 정조의 느낌으로 다가온다.
세계문화유산 : 조선왕릉: 1408년부터 1966년까지 5세기에 걸쳐 조성된 조선왕실의 왕과 왕비의 무덤 40기. 뛰어난 풍광을 가지고 있는 장소들로서, 봉분외에 조각, 건축물 등이 조화를 이루고 있음.
정조대왕이 능 행차 중 읊었던 아래의 시를 보면 효심이 얼마나 깊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아침이나 저녁이나.
사모하는 마음 다하지 못해.
오늘 또 화성에 왔구나.
부실 부실 비 내리니,
배회하는 마음 둘 곳이 없어라
만약에 여기서 사흘 밤만 잘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겠네.
더디고 더딘 길
아바마마 생각하는 마음, 흘러가는 구름 속에 생기네.
왕릉을 들어가기전의 다리로 금천교라하여 속세공간과 묘역공간을 구분하는 다리란다.
묘역을 조성할때 정조대왕은 이지역에 거주하는 백성들에게 다른 거주지역(화성)을 알선해주거나 부동산 값이나 이주비용에 생활비등을 지불해줌으로써 우리나라 최초의 신도시개발의 원형을 제시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융릉 금천교는 원래 정조의 원행로 중 지금의 성남비행장 안에 있던 대황교를 이곳에 옮겨다 놓은 것이다.
1970년대 비행장 활주로 공사로 그곳의 주민들이 보상금을 받고 이주를 하게 되었고 이 다리도 묻히게 되었으나 임금님이 건너셨던 다리를 보존하자는 주민들의 마음으로 성금을 걷어 이곳 융릉 입구에 갖다 놓은 것이다. 난간이 없던 것을 만들고 ´원대황교´라 새겨놓았다. 원래 "황"은 중국의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글자이기도하다.
비슷한 예로 중국에서는 황제앞에서 만만세를 사용하였지만 조선에서는 천세를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이 연못의 이름은 ´곤신지´이다. 융릉에서 곤신방향에 있는 연못이라는 뜻으로 그 모습이 원형인 것 또한 특별한 점이다. 원래 우리나라는 네모난 연못에 둥근 섬을 만들어 천원지방 즉 ´하늘은 둥글고 지구는 네모나다´는 사상을 나타냈는데 융릉의 연못은 둥글게 만들었다.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논다는 이곳의 풍수지리의 용과도 관련이 있는 연못으로 알려져있다.
연못 석축을 자세히보면 위쪽 절반은 색상이 고풍스러운 것을 볼수 있다. 원래는 파묻혀 곤신지의 위치를 잃어버렸다가 십여년전 홍수로 위치가 들어나 복원되었는데 절반의 석축은 발굴되었으나 나머지 소실된 부분은 요즈음의 석재를 사용하였다.
홍살문과 참도와 정자각과 릉은 일직선상으로 배치하는 형태가 관례화된 형식인데 융릉은 정자각에서 약간 비켜나있다.
이는 정조대왕이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갑갑하게 돌아가셨음을 가슴아프게 생각하여
무덤에서나마 정자각등 가림막이 없는 공간을 내어드리기위한 효심에서 란다.
홍살문:궁전·관아(官衙)·능(陵)·묘(廟)·원(園) 등의 앞에 세우던 붉은색을 칠한 나무문.
홍전문 또는 홍문(紅門)이라고도 한다. 9m 이상의 둥근기둥 두 개를 세우고 위에는 지붕이 없이 화살 모양의 나무를 나란히 박아 놓고, 가운데에는 태극 문양이 있다 . 이곳이 신성한 지역임을 알려준다.
재실부터 홍살문까지의 진입공간과 홍살문부터 정자각까지의 제향공간 그리고 가장 성스러운 능상공간으로 나뉜다
능의 중심 건물인 정자각(丁字閣)은 형태가 '정(丁)'자의 모양을 하고 있어서 정자각이라고 하며, 전체적으로 붉은 색을 띄고, 단청이 되어 있다. 지붕 형태는 일반적으로 모두 맞배지붕이다
정자각은 능에서 제례를 지낼때 정자각 내부에 제례 음식을 차리고 모든 의식을 진행하는 곳이다.
정자각지붕의 흰부분이 시멘트인줄 알았는데 궁궐에서만 사용되는 엤날 건축재질이란다.
예를 들면 대원군시절 서양인에게 파해쳐졌던 남연군묘도 같은 재질이라나.
조선 초기엔 왕릉 봉분을 둘러싸고 있는 호석의 형태가 병풍석을 견고히 두르고 그 둘레에 난간석을 두르는 모습이었는데
세조의 유지로 광릉에서 처음으로 병풍석은 생략하고 난간석만 둘렀다. 그러나 그 후 왕릉에서 다시 병풍석과 난간석이 세워져
영조 재위 중 엄격히 정해지니 ´왕이 승하하면 난간석으로 한다´였다.
그래서 정조는 왕이 아니었던 아버지에게 난간석이 아닌 병풍석을 설치해 드렸다.
병풍석은 중간에 가운데 직사각형 부분을 면석이라 하고 12면의 귀퉁이 꺾어진 부분을 우석이라 하며 우석의 윗부분 밖으로
삐죽 나온 꽃봉오리 부분을 인석(引石)이라 한다.
참도: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박석을 깔아놓은 신도와 어도.
가운데 제일 높은 길은 신도 우측에 중간 높은 길은 어도(임금님이 다니는 길) 낮은 길로 신하들이 뒤따르며 좌측은 문인길
우측은 무인길. 융건릉의 참도는 다른 릉보다 훨씬 넓게 깔려있는게 특징이다.
기둥에 박혀있는 철사는 가림막을 설치하기 위한 장치란다.
축문이나 음식을 묻거나 태우는 예감(소전대 또는 망료위/제사지낼때 사용된 축문은 초기 시절에는 땅속에 파묻었으나 후기에 들어서는 태웠다.. 사각지점이 에감이라고하는
축문을 태우는 장소다.
혼령이 묘로 올라가다 쉬어가라는 무덤 올라가는 중간에 약간 언덕이 조성되어있다.
잡상 : 목조 건축의 추녀마루에 장식으로, 배열하는 작은 짐승 형상들이며 이 정자각의 잡상들은삼장법사 손오공 사오정 저팔계이며 불경구하러 가는 모습이란다.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산신석
임금님의 상을 치루는 기간은 대게 오륙개월이 걸리는데 그동안 시신은 부패하지 않도록 약재처리후 얼음위에 보관하고 얼음이 녹는 습기를 흡수하기위하여 미역을 시신아래 넣어두고 수시로 바꾸어줬으면 이런 미역들이 시중에 나돌아 값싸게 판매되기도 해서 속담에 "윗상전 상후에 미역값만큼 싸겠느냐"라는 속담도 생겼다한다.
융릉과 건릉은 합장 묘인데 생전에는 좌의정 우의정 순이지만 무덤에서는 순서가 바뀌어 우측에 임금님이 좌측에 황후가 묻혀있단다.
신도는 왼쪽 계단으로, 어도는 오른쪽 계단으로 따로 오르도록되어 있다.
신도에서 연결되어 오르는 왼쪽 계단을 신계(神階)라고 하며,
어도에서 연결되어 왕이 오르는오른쪽 계단은 동계(東階)라고 한다.
정자각 왼쪽(서쪽)으로는 내려가는 계단이 하나 뿐인데,
이는 제례가끝나면 임금만 내려 갈 수 있는 계단으로 서계(西階)라고 한다.
선대왕 혼령은 능으로 올라가기 때문에 내려오는 계단은 필요가 없다.
서계는 제관이 예감으로 내려갈 때도 사용하며, 사당이나 사묘에서도동입서출(東入西出)의 법도를 따른다.
신계의 소맷돌(돌계단의 난간에 대한 순 우리말)의 양 옆에는 구름 문양(雲文)과 태극 문양이 새겨져 있으며,
구름문양은 천계의 세계를 나타내는 의미도 있다.
소맷돌 맨 아래의 고석에 새겨진 태극 문양은 대부분 3태극입니다. 건릉(健陵)은 4태극이다.
수라간: 용주사에서 제사음식을 만들어 이곳 수라간의 검수를 거친다음에 제상에 진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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