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화성시 태안읍의 화산 기슭에 용주사(龍珠寺)가 자리하고 있다.
효심이 지극한 정조가 사도세자를 위하여 지은 용주사는 4년간의 공사 끝에 완공했는데, 낙성식 전날 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기에용주사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해 내려온다.
入此門內(입차문래) 이 문에 이르거든
幕存知解(막존지해) 마음을 허공같이 비우라.
용주사의 삼문 기둥에는 "龍珠寺佛" 의 네 자를 첫 글자로 한 4개의 柱聯이 걸려있다..
龍蟠華雲 (용반화운)용이 꽃구름 속에 서리었다가
珠得造化 (주득조화)여의주 얻어 조화 부리다가
寺門法禪 (사문법선)절문에 이르러 선을 본받아
佛下濟衆 (불하제중)부처님 아래에서 중생을 제도한다.
죽농(竹濃) 안순환(安淳煥)의 글씨 龍珠寺'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독특한 형태의 삼문. 양반집 대가처럼 이 건물은 좌우에 줄행랑을 지닌 맞배지붕 양식으로 용주사 창건 당시에 세워져 여러 차례의 개수를 거쳤다.
세존사리탑으로 부르는 높이 4m의 이 탑은 전형적인 5층석탑의 형식을 갖추고 있는데, 1층의 기단위에 5층의 탑신과 옥개석을 차례로 올리고 상륜부에는 노반·복발·양화·보주를 모두 갖추었습니다. 기단의 면석과 탑신에는 우주(隅柱)가 모각되었으며 기단갑석 위에는 옥신고임이 몰딩으로 처리 되었습니다 .
옥개석은 처마끝선에서 약간 반전되었고, 옥개받침은 3단씩입니다. 전체적인 옥개석의 체감은 비율이 작아서 3층을 넘어서야 비로소 줄어들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1702년에 성정(性淨)스님이 사리 2과를 사리병에 담아 석탑에 안치하였다고 합니다
천보루 누각의 좌우로는 7칸씩의 회랑이 있고 동쪽에 나유타실(那由陀寮), 서쪽에 만수리실(曼殊利室)이다.
종 목 경기도 문화재자료 제36호
지 정 일 1983.09.19
소 재 지 경기 화성시 태안읍 송산리 188
시 대 조선시대
용주사는 사도세자의 묘소를 수호하고 명복을 빌어주기 위해 정조 14년(1790) 세운 절이다. 원래 이곳은 통일신라 때 세워 고려시대 때 소실된 갈양사의 옛터라고 전한다.
천보루는 절을 세울 당시에 지은 누각으로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는 새 날개 모양으로 짜맞춘 익공 양식이다. 좌우에 있는 요사채보다 앞쪽으로 나와 있으며, 2층으로 오르기 위해서는 좌우 요사채 앞의 계단을 통해야 한다.
정면에서 보면 요사채 건물과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어 대웅보전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천보루 아래를 통해야 한다.
대중들의 소원을 적어 걸어놓은 소원지들
天保樓 뒤편에 걸린 현판 弘濟樓 此愚 김찬균(金瓚均)의 글씨이다.
경기도 화성시 용주사 대웅전 옆 잔디밭에는 부모님의 높고 큰 은혜 10개항을 새긴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탑이 서있다. 다른 사찰에는 없는 탑이다. 용주사가 효행(孝行)의 대본찰(大本刹)임을 말해주고 있다.
효자로 알려진 정조대왕은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 설법을 듣고 크게 감동, 부친의 넋을 위로하는 절을 짓기로 했다. 양주군 배봉산에 있던 사도세자의 묘를 화성으로 옮긴 뒤 사찰을 중건,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시고 극락왕생을 기원했다
부모은중경의 중심내용 부모10중대은(十重大恩)은
① 아기를 배어서 수호해주신 은해
② 해산에 임하여 고통을 이기시는 은혜
③ 자식을 낳고서야 근심을 이기시는 은혜
④ 쓴 것을 삼키고 단 것을 뱉아 먹이시는 은혜
⑤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누이시는 은혜
⑥ 젖을 먹여서 기르시는 은혜
⑦ 더러워진 몸을 깨끗이 씻어주시는 은혜
⑧ 먼길을 떠나 갔을 때 걱정하시는 은혜
⑨ 자식을 위하여 나쁜 일까지 감히 짓는 은혜
⑩ 끝까지 불쌍히 여기고 사랑해 주시는 은혜
용주사 대웅보전 왼쪽에 사도 세자, 헌경 왕후, 정조, 효의 왕후의 위패를 모신 건물로 돌아가신 부모님께 효를 다하려는 사람들이 모신 위패가 많다.
전강 스님(1898~1975)은 수좌계에서 ‘북 송담-남 진제’로 회자되는 송담 스님의 은사다. 전남 곡성 태생으로, 16세에 속가 모친과 사별하면서 출가사문의 길에 들어섰다.
합천 해인사에서 인공 스님을 은사로 출가, 이후 응해 스님을 계사로 사미계를 받았다. 이후 스님은 8년간 곡성 태안사에서 치열한 정진 끝에 깨달음을 얻었으며, 25세에 만공 스님에게 선종 77대 법맥을 전수받았다.
당시 33세의 젊은 나이로 불지종찰 통도사 조실로 추대됐으며, 이후 법주사 복천선원, 동화사 선원, 용주사 중앙선원 등에서 조실로 지내면서 후학을 지도했다.
만년에는 인천 용화사에 법보선원을 개원, 중생교화를 했으며, 지난 1975년 법납 61세, 세수 77세로 열반에 들었다.
전강 선사 사리탑 / 국보 제101호인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을 모형으로 했다.
석가의 팔상도 조각
팔상도:석가모니의 일생을 여덟 단계로 나누어 그린 불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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