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편 잡기장 한구절

200806. 한 마리의 검은 새는 나의 할아버지다.

나그네수복 2021. 12. 23. 07:17

 

범람하는 잠실 대교 위에서 떠 오르는 나의 할아버지

 

잠실대교 다리목 까지 넘실거리는 황토물을 보고 있노라니

국민학교 시절의 경천가의 허망했던 논배미가 언뜻거린다.

 

순창 대모암 할미산성 비탈받이 논들을 산성논이라 불렀다.

산성논 아래에는 순창의 젖줄이자 섬진강의 지류인 경천이 감돌았다.

경천의 뜰에는 널찍한 논들이 질편하게 널려있어 풍요로웠고

그 들판과 물줄기의 경계선에 우리네 논 한배미가 있었다.

어린 기억으로는 작은 아버지네 논인것 같기도 했지만 

어린 나에게는 힘겨운 가기 싫은 일터였다.

할아버지는 시간만 나면 일터에 나를 데리고 다니셨고

사철따라 다른 농삿일들은 항상 나를 대기하고 있었다.

어느해인가 큰 물이 들었다. 

논에 나가보니 그렇게 튼튼했던 논둑이 처참하게 다 쓸려버렸다. 

자갈덩어리의 잔해는 논바닥으로 사정없이 쏠려들었고

벼들은 모조리 들어누어 곧 죽어가는 아우성이었다.

그나마 남아있은 벼들을 세우는 작업이 시작되었고

둑을 다시 쌓은 도전은 농군들의 버릴 수 없는 숙명이었다.

지칠줄 모르는 할아버지는 그 모든 걸 해내고 수확을 거두어들였다.

같은 일들이 그 다음해에도 다시 반복되었다.

어린 나에게는 극복이 아니고 절망이였으나

할아버지는 달랐다. 끝끝내 삶의 동아줄을 놓지않으셨고

결국에는 다소라도 열매를 지게에 담아 집으로 실어 날으셨다.

 

으르렁대는 범람의 공포에도 한 주먹 널판지에 앉아

두리번거리는 한 마리의 검은 새는 나의 할아버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