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려서부터 교과서에서 사진으로만 봐왔던 미륵사지 석탑을 모처럼의 기회가 생겨 찾게되었다.
원래의 모습은 흔적이 없고 해체복원 작업중인 터만 구경하게 되었다. 보고싶었던 모습을 보지못해 아쉬웠지만 복원하는
터와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운이라면 행운이라고 위안을 삼는다. 건물의 세월을 이기지못하고 붕괴될 지경이어서
해체복원 작업은 필수일 수 밖에 없었는데 작업시작한지가 벌써 여러해란다.
붕괴전 탑의 겉모양은 부재들이 비교적 양호한 것으로 보였는데 해체하고 보니 탑내부의 돌들은 내려누르는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반조각 아니면 4조각 8조각을 갈라진데다가 분실된게 많아 조각들을 본드로 이어붙이다 없어진 조각들은 만들어 붙이기도 해서 복원작업이 많이 늦어진다는 해설사의 말을 동감하면서 백제무왕시대의 공사규모는 경탄과 놀라움 자체였다.
가능하면 원래의 부자재를 사용하여 옛모습을 되찾으려 노력한다하니 서탑처럼 실망을 주지않는 훌륭한 성과가 있기를 기대.
석탑은 원래 동탑과 서탑 둘이 있었는데 동탑은 무너지는 형태일지언정 백제의 숨결을 고스란이 전해주는 반면 서탑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현재의 서탑은 동탑을 컴퓨터시물레이션을 복원하여 서탑의 자리에 현대적인 돌 가공법으로 수십억원의 예산을 들여 세웠다.예스런 모습은 보이지않고 전형적인 현대의 제작된 제품이 여실히 들어나면서 박제된 어색한 모습이 실망스럽다.
석탑 내부의 모습이다. 내부는 공간이 없고 일층만 열십자 모습으로 겨우 사람하나 들어다닐 수 있는 구조다.
석탑은 백제때 세워졌지만 당간지주는 신라때 세워진 국보란다. 여기저기서 당간지주를 많이 보았지만 여기 당간지주의 규모를 본적이 없다. 절의 규모에 맞게 당간지주도 크게 만들졌나 싶다 . 신라 고려 유물도 많이 출토되고 있어 고려때까지 사찰이 유지되다가 여러가지 남겨진 기록으로 보아 조선초에 폐사된 것으로 추측한단다.
보통 사찰들은 1당 1금탑으로 조성되는게 원칙이나 미륵사지는 3당 3금탑형식으로 지어졌다. 3당3금탑이라하나 기본축은 역시 1당1금탑 중앙의 목탑을 중심으로 양쪽의 석탑은 날개형식이란다. 양쪽의 석탑은 목탑을 간략화한 형태로 목탑의 특징을 다 가지고 있어 우리나라만의 사찰특징인 석탑의 시원으로 나중에 신라 감은사탑을 거쳐 불국사의 석가탑 다보탑으로 탑의 절정기로 발전하게 된다. 이 미륵사지에는 장승의 원조 모습도 있고 우리나라 최초의 석등의 모습도 볼수 있다.
미륵사지에서는 그동안 가려졌던 백제문화의 장대하고 장엄한 모습을 전율로 받아들이면서 세월을 거슬러올라가는 체험을 가지게되며 신라불교의 화엄사상과 대비되는 백제불교의 미륵사상으로 불토정국을 건설하려는 백제무왕의 웅대한 심국통일의 꿈을 보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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