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여행/이탈리아 아시시

하루 숙박일정의 아시시가 무척 아쉽다. 일어나자 마자 정갈하게 마음을 가다듬고 동네 한바퀴

나그네수복 2017. 9. 10. 10:02






















































* 성 프란치스코 성인
1182년 이탈리아 아씨시의 마구간에서 큰 포목상을 경영하는 상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프란치스코의 말 뜻은 원래 '작은 프랑스인'으로 그는 성격이 활발하고 지식을 겸비한 호탕한 청년으로 성장, 한 때 자신의 젊음과 재산을 낭비하며 지내기도 했다. 그러다 아씨시와 페루지아 간에 벌어진 전쟁터에서 포로로 잡히고 병으로 눕게 되면서 마음의 변화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무엇이 내 삶에 의미를 준단 말인가? 자문하던 중에 뜻 밖에 나병 환자를 만나 강한 충동으로 나병환자의 손에 자기의 입을 맞추면서 나환자들에게 자비를 베풀기를 시작했다. 두 번째의 체험은 반쯤 허물어지는 다미아노 소성당에서 주님께 기도하고 있을 때 거기에 걸려있는 십자가 상에서 "프란치스코야, 가서 허물어져 가는 나의 집을 고쳐 세워라"는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는 그때부터 회개하기 시작하였고 아버지의 재산을 가지고 성당 보수비를 마련하였다.
화가 난 그의 아버지는 소송을 하게 되어 그는 재판장 앞에 서게 되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나는 당신의 아들이 아니고 하느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말하며 입고 있던 의복과 소지품 일체를 아버지에게 돌려주고 홀로 청빈을 모토로 오로지 주님 말씀에만 관심을 쏟고 살았다.
성인은 옛 동료들로부터 초대받은 잔치 자리에서 "나는 가난과 결혼하려고 해"하면서 결연한 자세를 보이기도 했다. 그는 마침내 자신의 자유의사로 가난한 사람이 되었고, 그렇게 함으로써 비할 수 없는 평화를 얻었다. 가난한 자와 똑같이 된 프란체스코 는 이렇게 말했다. "거지를 욕하는 자는 누구 이건 간에, 모든 가난한 이들이 그분의 고귀한 표를 지니고 있는 그 그리스도를 모욕하는 것이다. 성인은 다미아노 성당에서 미사참례 도중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 다니지 말 것이며, 식량자루나 여벌의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아라. 일하는 사람은 자기 먹을 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 (마태 10, 9­10)는 말씀을 듣고 "이것이 바로 내가 원하는 것이다. 바로 내가 찾고 있는 것이다. 바로 내가 온 마음을 바쳐 행할 일이다." 하시면서 형언 할 수 없는 기쁨으로 손 벽을 쳤다. 그래서 청빈의 덕을 생활로 삼아 감화를 받은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 12명의 제자를 두게 되었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 교황(1198~1216)에게 수도원의 인가를 청원하여 「작은 형제회」라는 이름으로 수도회를 창설하였다.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나 제 2회 글라라회와 프란치스코 제 3회를 설립하였다. 1216년 그는 '수도회'의 기능을 발휘하기 위해 몇 개의 관구로 분할하고 외국에도 파견하게 되었다. 그는 자주 고요한 곳을 찾아 기도하였고 엄격한 고행과 끊임없는 묵상을 하곤 하였다. 1224년 그가 알베나 산에서 기도하고 있을 때 예수께로부터 주의 상처와 같은 오상을 받게 되어 그 후 2년간 예수님의 고통을 체험하며 죽을 무렵까지 설교를 계속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와 같이 완전한 가난 속에서 주님의 뜻에 알맞은 생활을 하였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날아다니는 새에게까지 주님의 복음을 전했다고 할 정도로 자연을 사랑했고, 대자연을 통해서 하느님께 영광을 드렸다. 그 유명한 '태양의 찬가'와 '평화의 기도'는 지금도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카토릭신문투어에서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