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의 삶에 성공한 총각아저씨 호지명의 집
호찌민은 프랑스 총독 관저였던 주석부에 잠시 머물렀다가 큰 집이 필요없다며 프랑스 전기수리공이 살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 1층에는 면담실과 회의실이 갖춰져 있고 2층에는 침실이 꾸며져 있다. 호찌민은 베트남의 남북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친 국민적 영웅으로 베트남과 결혼했다면서 평생 독신으로 살았고, 생활 또한 검소했다. 현재 베트남에서 발행되는 모든 지폐에 호찌민 얼굴이 새겨져 있을 정도로 국민에게 열렬한 사랑과 존경을 받는다.
호지명이 남긴 3가지 유훈
베트남의 국민영웅 호지명이 마지막 남긴 3세가지 유훈이 있었다.
첫째는 “이제 곧 전쟁이 승리할 텐데, 전후에는 적측의 누구에게도 보복치 말아라. 모든 이를 용서하고 국민으로 받아들여라”
둘째는 “나의 무덤을 만들지 말라. 매장하여 무덤을 만들면 인민들에게 페를 끼치기 쉽고, 또 우상화 하거나 신격화 할 위험이 있다. 시신을 화장하여 재를 조국의 북부, 중부, 남부에 뿌려 통일된 조국의 번영하는 믿거름이 되겠다."
셋째는 “전쟁이 끝난 후에 전사한 장병들의 아내나 자녀들에게 국력을 기우려 성심성의를 다하여 국가가 돌봐줄 것이며, 전쟁 중에 다친 상이군인들 역시 국가가 지성으로 우대하라”
호지명은 다산(茶山) 정약용이 지은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정독하였다. 그는 비록 공산주의자였지만 우리가 아는 공산주의자들과는 달랐다.
호지명의 위대한 ‘3꿈 정신’
평생 정적을 숙청한 적이 없었고, 자신을 우상화, 신격화하는 일이 없었다. 그는 국민들로부터 ‘胡 아저씨’로 불리면서 일생을 청빈하게 독신으로 살았다. 죽을 때는 옷 한 벌, 신 한 켤레만 남기고 갔다. 마치 메뚜기와 코끼리싸움, 자전거와 비행기의 싸움으로 비유할 수 있을, 월남과 미국간의 전쟁에서 베트남이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지도자 호지명의 인격과 지도력에서 비롯된 것이었다.호지명의 사상을 간추려 말하면 ‘3꿈 정신’ 이라 할수 있다. 그는 민족주의자 이면서 동시에 베트남을 구하기 위해 공산주의를 표방하며 일평생 조국을 위해 ‘3꿈 정신’ 을 실천하였다.하나는 함께 산다는 정신으로서의 ‘꿈일 정신’ 이다. 둘은 함께 먹는다는 뜻으로서의 ‘꿈안 정신’ 이다. 셋은 함께 일한다는 뜻으로서의 ‘꿈담 정신’ 이다.
국민적 지지와 존경받는 이유 3가지
그는 최고의 지도자의 자리에서도 자신을 위해서 특권을 누리지 않았다. 국민과 동고동락하면서 국민적 신뢰감을 바탕으로 국가통일까지 이루는 에너지의 원천이 되었다. 호지명이 당대에 온 국민의 지지와 존경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다음 3기지로 요약된다.
1) 어떤 경우에도 청렴결백(淸廉潔白) 했던 삶의 자세 2) 교육입국(敎育立國)의 비전을 품고, 젊은이들을 교육. 3) 힘없는 백성들과 함께하며, 소외된 계층을 항상 품어 주었다. 그는 모든 것을 버림으로 써 조국의 독립을 얻었고, 영원한 베트남인들의 존경을 얻었다. 그리고 베트남인들은 ‘자랑스러운 지도자 ’호지명‘ 을 가슴에 품는 국민으로서, 행복을 얻었다. 영원히 존경받는 지도자를 가진 베트남사람들이다.
프랑스가 베트남을 식민통치할때 머물렀던 프랑스 총통의 관저, 베트남이 독립을 하고 이곳을 호치민의 관저로 이용하기를 권하였으나 호치민은 관저가 너무 호화롭다며 이곳에 머무르지 않았다고 한다.
호치민이 분수에 안맞는다는 관저를 거부하고 거주하던 집입니다. 이곳을 돌아보면 호치민의 얼마나 검소했나를 알수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