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여행/서울

윤동주 현진건 이광수 대원군 김환기 반계 윤응렬을 만나러 부암동을 걷다.

나그네수복 2012. 1. 29. 21:02

 

 

 

 문화재 등록 가옥의 연혁 등에 대한 정밀조사 결과, 이광수 선생이 1934년부터 1939년까지 거주·활동했던 것으로 알려진

별장은 1972년 같은 장소에 형태가 비슷한 다른 한옥 건물 신축시 철거되었다. 현재 등록된 가옥은 당시의 건물이 아니지만

 건물 신축 과정에서 문단 원로들의 노력으로 건축주가 당초 계획하였던 양옥이 아닌 원래 별장 형태의 한옥으로

확장·건축되었고 현재에도 선생이 심은 향나무와 우물 등이 남아 있는 등 문인의 자취가 남아 있는 의미 있는 장소이므로 

문화재 명칭을 “홍지동 이광수 별장터”로 이름짓는다..

 

 

현재는 이광수 별장터는 개인소유로 되어있고 사람이 거주하고 있어 겉모습만 보게된다.

 

 

 

 

홍지문과 탕춘대성은 서울 도성과 북한산성을 연결하기 위하여 쌓은 것이다.    숙종이 친필로 '弘智門'이라는 편액을 하사하여

 달면서부터 이것이 공식적인 명칭이 되었다.
홍지문은 숙종 41년(1715)에 건축되어 1921년까지 탕춘대성문으로 그 역할을 다하였으나 1921년 홍수로 붕괴되어 50여년간 방치되어 왔다. 이에 서울특별시에서 1977년 탕춘대성과 함께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복원하였다. 현판은 고 박정희 대통령이 쓴 것이다. 화강암으로

중앙부에 월단(月團, 아치)이 꾸며지고, 그 위에 단층 문루가 세워져 있다. 석축 윗 부분 둘레는 여장(女牆)이 있고, 문루는 평면이 40㎡로

우진각 지붕이다.
홍지문 북쪽으로 홍제천(모래내, 사천)을 가로질러 홍지문과 같이 설치하였던 오간대수문(五間大水門)도 1921년에 홍수로 유실되었으나

 1977년 홍지문 복원 때 길이 26. 72m, 폭 6.8m, 높이 5.23m, 수구 폭 3.76m, 수구 높이 2.78m의 5간의 홍예교(虹霓橋)로 복원하였다.
탕춘대성은 인왕산 동북쪽에서 시작하여 북쪽의 능선을 따라 내려가다가 사천을 지나 북한산 서남쪽의 비봉 아래까지 연결하여 축성한

산성이다. 이 산성의 명칭을 탕춘대성이라고 한 것은 현재 세검정이 있는 동쪽 약 100여m 되는 산봉우리에 탕춘대(蕩春臺)가 있었던

 것에서 연유한 것이며, 한성의 서쪽에 있다고 하여 서성(西城)이라고 하였다.
왜란과 호란 속에서 서울이 함락되며 갖은 고초를 겪은 조선왕조는 전쟁이 끝난 후 국방은 물론 유사시에는 수도를 방위하기 위한 온갖

노력을 경주하였다. 효종(1649∼1659 재위), 현종(1659∼1674 재위)을 거쳐 숙종 때에 이르러서는 수도방위에 더욱 치중하였다.

 숙종은 재위 30년(1704) 3월부터 도성 수축공사를 시작하였고 이 공사는 6년 후인 숙종 36년(1710)까지 계속되었다.
도성 수축공사를 끝낸 숙종은 왕 37년(1711)에는 북한산성을 축성하였고 다시 탕춘대성을 축조하게 되었다. 이 탕춘대성을 축조하자는

 논의는 이미 숙종 28년(1702)에 신완(申琬)이 제의하였다. 그후 탕춘대성은 숙종 44년(1718) 윤8월 26일부터 축성하기 시작하여

10월 6일까지 40일간 성 전체의 약 반을 축성하고 일단 중지하였다가 다음해 2월부터 다시 축성하여 약 40일 후에 완성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탕춘대성 전체의 길이는 약 4km였음도 알 수 있다. 성내에 연무장(鍊武場)으로 탕춘대 터(오늘날 세검정초등학교)에

 연융대(鍊戎臺)를 설치하는 한편, 비상시를 대비하여 선혜청(宣惠廳) 창고와 군량창고인 상·하 평창(平倉)을 설치하였다.

그 후 탕춘대성의 축성과 함께 그 성안을 총융청(摠戎廳) 기지로 삼고, 군영도 배치하였다.  .

 

 

 

쉼 박물관 - 삶과 쉼이 공존하는 공간

 

2007년 10월 서울 종로구 홍지동에 문을 연 ‘쉼 박물관’은 전통 상례 문화라는 독특한 주제를 소개하는 박물관으로서도 의미 있지만, 설립자인 박기옥 이사장이 40년간 살아온 자신의 집을 개조해 삶의 연장으로서의 ‘죽음’에 대한 조상들의 생각을 자연스럽게 느낄 수 있도록 만든 공간이라는 점에서 더 의미 깊다 하겠다. 따뜻한 차 한 잔과 함께 가족같이 맞아주는 학예사의 설명이 편안함을 더한다.

 

의학의 발달로 평균 수명이 날로 늘어간다지만 인간에게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숙명 같은 것이다. 거기에 ‘하루라도 빨리’를 강조하는 각종 보험과 상조회사들의 광고를 보고 있노라면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세상의 속도와 부담을 근심해야하나 하는 자조적인 생각마저 들곤 한다. 하지만 우리 선조들의 죽음에 대한 인식은 달랐다. 끝이라 여기지 않았고 무조건 슬퍼만 하지 않았다. 죽음은 끝이 아니고 삶의 연장선에 있는 ‘쉼’의 시작이었고 망자를 보내는 상례는 그래서 축제와 같았다.

 이름만으로도 편안한 ‘쉼 박물관’은 이러한 우리 전통 상례 문화를 주택을 개조한 박물관 공간 곳곳에서 느낄 수 있도록 꾸며져 있다. 안방엔 화려한 상여가, 거실엔 요여가 놓여있고 상여를 장식했던 다양한 꼭두며 용수판, 그 밖의 장식물들이 원래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레 자리하고 쉬어가고자하는 이를 맞이한다. 직설적이고 자극적이기만 한 세상 속에서 떠나가는 사람에 대한 진정한 배려가 무엇인가를 가슴 한 켠에 안고 나온다. 삶과 쉼이 다르지 않음에 슬프지만 슬프지 아니하다.

 

 

 

 

 

 

 

대원군 별장은 원래 창의문(彰義門) 밖 종로구 부암동 산 16-1번지에 있었던 건물이다. 1958년 서예가 소전(素筌) 손재형(孫在馨)이

 이곳에 집을 지으면서 뒤뜰 바위 위 지금의 위치로 이전한 것이다. 부암동 산 16-1번지에는 조선말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별장인  

 석파정(石坡亭,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6호)이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이 대원군 별장 건물은 그 곳 사랑채에 부속되어 있던

건물이었다. 건물 정면에는 'ㄱ'자로 꺾인 곳을 따라 툇마루를 설치하였고, 그 양 끝은 전벽돌로 쌓은 측벽으로 막았으며, 건물 뒷면

중앙 3칸에는 쪽마루를 놓았다. 건물 앞퇴에는 대청마루 앞부분을 제외하고 모두 난간을 설치하여 고급스런 분위기로 장식하였으며,

기둥에는 주련(柱聯)을 달았다. 대청을 중심으로 하는정면 부분과 내부 구조, 그리고 창살은 전통 한옥형식을 갖추었으나, 외형을 이루는

전반적인 모습은 조선말기에 전래된 중국 청(淸)나라건축의 영향을 받았다. 이건하면서 원 모습대로 복원하지 않고 평면과 구조를

 부분적으로 바꾸었다.
손재형은 일본으로 유출된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를 천신만고 끝에 한국으로 가져온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말년에 이곳에서

작품활동을 하였다. 이 별장 아래에 있는 손재형이 살던 건물들은 현재 전통음식점 '석파랑'으로 사용되고 있다.

 

 

 

 

 

 석파정을 찾아보는게 이번 걸음중 큰 목적중의 하나인데 가림막을 치고 공사하는 OO문화원공사 그리고 빈틈없는 도로차단 때문에 겉모습도 보지못하고 골목길만 겉돌다 내려오는 길에 전면에 조망으로 보이는 북한산 승가사 능선과 북악산능선 골목담들을 촬영해본다.

안내판도 흔적이 없어 이리저리 불편과 아쉬움만이 가득한 길이었다.

 

석파정은 조선 제25대 철종과 제26대 고종 연간에 영의정 등 고위직을 지낸 김흥근(金興根 1796∼1870)이 경영한 별서(別墅)였으나,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집권한 후 몰수하여 자신의 별장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서울 성곽의 북쪽 밖에 위치한 이곳은

수려한 산수와 계곡을 배경으로 거암(巨巖)과 오래된 장송(長松)이 많아 세검정 자하문 밖으로 통칭될 정도로 한양 도성의 경승지로

꼽혔던 곳이다.
원래 석파정 서북쪽 뒤 바위 앞면에 '三溪洞'이라고 새겨진 글자가 있어 김흥근이 소유하며 살고 있을 당시에는 '삼계동정자(三溪洞亭子)

'라고도 불렸다가, 훗날 흥선대원군의 소유가 되면서 '석파정'으로 불렸다. 대원군은 앞산이 모두 바위여서 자신의 아호를 '석파(石坡)'

라고 한 뒤, 정자 이름을 '석파정'으로 바꾸었다.
조선말의 우국지사 황현(黃玹, 1855∼1910)의 《매천야록》 권1에는 석파정의 내력이 적혀 있다. 고종이 즉위하자 김흥근은 흥선 대원군이

정치를 간섭하지 못하게 하였다. 하지만, 곧 대권을 손에 넣은 흥선대원군은 김흥근을 미워하며 그의 재산을 빼앗기 시작했다.

삼계동에 있는 김흥근의 별장은 한성에서 가장 유명한 정원이었는데, 하루는 흥선대원군이 그 별장을 팔 것을 간청하였으나 김흥근이

듣지 않자 하루만 빌려 놀게 해달라고 하였다. 서울의 옛 풍습에 따라 정원을 가진 사람으로서 빌려주지 않을 수 없어 김흥근이 억지

승락을 하자 흥선대원군은 고종이 행차하도록 권하고 자신도 따라갔다. 그 후 국왕이 거처한 곳을 신하가 감히 거처할 수 없는 곳으로

생각하고 김흥근이 다시는 삼계동에 가지 않게 되자 결국 이 별장은 운현궁의 소유물이 되고 말았다고 한다.

 

 

 

무계정사는 세종의 셋째 아들이었던 안평대군의 별장이다

 

안평대군 이용 집터는 세종의 셋째 왕자인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의 별장으로, 창의문(彰義門) 밖 무계동(武溪洞)에 있었으며,

 무이정사(武夷精舍)라고도 하였다. 세종 29년(1447) 4월 20일 안평대군이 꿈에 박팽년(朴彭年) 등과 함께 노닐었던 도원(桃源)을 당대

최고의 화가인 안견(安堅)에게 그리게 하여 완성된 작품이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이다. 그림에 나타난 장소를 찾아 이곳에 당도하여

여기가 꿈 속에서 본 무릉도원과 같은 곳이라 하고 정자를 세워 글을 읊고 활을 쏘며 심신을 단련하였다고 한다.
이 정사는 효자동에서 자하문고개를 넘어 부암동사무소를 끼고 돌아 올라가면 오른쪽 언덕 위에 위치해 있다. 대문을 들어서면 오른편에

있는 커다란 바위 앞면 윗부분 가운데에 안평대군의 필적으로 알려진 '武溪洞(무계동)'이란 글씨가 큰 현판 모양으로 옆으로 음각되어 있다. 바위를 오른쪽으로 끼고 바로 맞은편 언덕에는 원래 안평대군의 집터라고 추정되는 곳에 'ㄱ'자 모양의 건물이 동남향을 하고 서 있으며,

 정사 앞으로는 멀리 북악산 줄기가 보인다.
현재의 건물은 두벌 화강석 기단 위에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건물로, 오른쪽 끝에서 전면으로 1칸 반이 꺾여 나와 돌출되었다.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안평대군은 1452년 단종 즉위 후 이징옥(李澄玉) 등을 시켜 함경도 경성(鏡城)의 무기를 서울로 옮기고 이곳에서 장사들을 모아 군사훈련을 하며 무력 양성에 힘썼다고 한다. 이곳은 당시 사람들이 '흥룡지지(興龍之地)'라고 말하였던 곳으로, 이는 곧 왕이 나올 역모의 땅으로

간주되었음을 뜻한다. 안평대군은 단종 원년(1452) 수양대군이 사은사(謝恩使)로 명나라를 다녀온 뒤 실권을 박탈당하고, 이듬해 계유정난

(癸酉靖難)으로 김종서(金宗瑞) 등을 죽일 때 역모로 몰려서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교동(喬桐)으로 옮겨져 죽음을 당하였다.

그는 시문·서·화에 뛰어났으며, 이곳으로 문인들을 초빙하여 시회(詩會)를 여는 등 풍류를 즐기며 호방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안평대군이 죽은 후 이곳도 폐허가 되고 말았다.
안평대군은 영조 23년(1747) 영의정 김재로(金在魯)의 상소로 복관되었다.

안평대군은 이 별장에서 꿈을 꾸고 화가 안견에게 꿈 이야기를 하여 그린 그림이 몽유도원도이다. 이 그림이 어떻게 일본으로 건너가게

 되었는지 모르지만, 나라를 떠나 있는 몽유도원도처럼 안평대원군의 별장도 부암동 그곳에 있으나 또한 없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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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평대군의 별서앞인 이곳은 우리나라의 대 사실 주의로 유명한 빙허 현진건이 30년대에 양계를 하면서 창작을 하며 살던 곳인데 집주인이 2003년에 고택을 허물어 지금은 오랫동안 공터로 방치되어 있고 머지않아 동네의 주차장이 된다고 한다. 우리나라 문학사상 지대한 역할을

한 작가의 산실이 증거하는 우리의 문화의 수준은 고택을 허물어 방치해둔 부산물과도 같고 주차장으로 변모해 버릴 위기와도 같은 생각이

 든다.

 

 

 윤응렬의 별서 윤응렬은 구한말 개화파인 윤치호의 부친.
 윤치호는 17세에 무과에 장원급제한 후, 1880년 제2차 수신사 김홍집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다녀와 별기군의 책임자가 됨.
 급진개화파가 갑신정변이후 그를 형조판서에 내정하는 바람에 갑신정변 실패 후 일본으로 도피해야만 했다.


 

 

 

 

 

 

 

 

 

서 시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가를......"
옛 청운 아파트 자리에 공원을 조성하고 자하문과 나란히 서울의 중심가를 내려다 보는 자리에 자리 잡은 시인의 동산은 윤동주 시인이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기 전 한 동안 머물던 누상동의 뒷동산 같은 곳으로 시인이 자주 올라 시상을 떠올렸을 것이라는 가정하에 구청을

비롯하여 윤동주 시인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노력으로 이루어진 동산이다. 식민지 청년으로  조국과 주위의 모든 것들을 사랑하다 요절한

시인의 아름다

운 흔적을 남겨 놓고자 하는 여러 사람들의 노력의 결과이다. 

 

 

 

 

지금까지 보아온 문학관중에는 제일 멋대가리가 없다. 종로구에 재정이 빈약한가?  윤동주라는 이름이 아깝고 애처롭다.

서시에 걸맞는 문학관이 준비되었으면 좋겠다.

 

 

 

서울 성곽의 4소문(四小門) 가운데 하나로 일명 ‘자하문(紫霞門)’이라고 한다. 1396년(태조 5)에 도성 8문의 하나로 창건되었으나 1413년(태종 13) 이후로는 폐쇄되어 일반적인 출입은 금지되고 다만 왕명에 의하여 일시적으로 통행을 허가하였다.

창의문이 경복궁을 내리누르는 위치에 있다는 풍수지리설적 해석 때문에, 문은 세웠으나 수백년간 사용하지 않았고 국가적인 공역 (工役)을 수행할 때처럼 긴요한 경우에 한하여 성문을 열었다.

현재의 문루(門樓)는 1741년(영조 17)에 세운 것으로 4소문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1956년에 이 문을 보수할 때 장여 속에서 묵서(墨書)가 나왔는데 여기에는 1741년(建隆 6) 6월 16일에 상량(上樑)을 하였다고 적혀 있어서 건립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북문() 또는 자하문()으로도 불린다. 1396년(태조 5) 서울성곽을 쌓을 때 세운 사소문()의 하나로 창건되어 창의문이란 문명()을 얻었다. 북한() ·양주() 방면으로 통하는 교통로였으나 1416년(태종 16) 풍수지리설을 주장하는 자들이 이 곳의 통행이 왕조에 불리하다 하여 폐문()한 채 일반의 통행이 금지되었다가 1506년(중종 1)에 다시 열어놓았다. 1623년 인조반정() 때는 능양군(:인조)을 비롯한 의군()들이 이 문을 부수고 궁 안에 들어가 반정에 성공한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문루()는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진 것을 1740년(영조 16) 다시 세우고 다락 안에 인조반정 공신들의 이름을 판에 새겨 걸었다. 1958년 크게 보수하였으며, 정면 4칸, 측면 2칸의 우진각 기와지붕으로 서울 사소문 중에서 유일하게 완전히 남아 있는 문이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인 김환기 다운 건물을 기대했었는데 건물외관은 그리 만족스럽질 못하다.